호화로운 백화점과 호텔, 오피스 빌딩 숲 사이에 홀로 고즈넉한 초록빛공원. 나뭇잎 무성한 플라타너스 가로수며, 연초록빛 넓은 잔디밭, 기묘한 모양의 바위와 돌들, 작은 동굴, 호숫가에는 이국적 음식을 제공하는 레스토랑까지, 징안공원에 들어서자 잠시 딴 세상에 와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산책길을 따라 죽 놓여 있는 벤치에 노인들이 삼삼오오 앉아 있다. 이제 막 카페들이 문을 열기 시작하고 오피스 빌딩 안에서 사람들이 곧 업무를 시작하려는 이른 아침, 공원 안 벤치는 이미 만원이다. 미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노인들이 벤치 주변을 서성인다.
대화하다 간혹 큰 소리로 웃는 노인들. 벤치에 앉아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바느질을 하는 할머니. 가져온 보온병을 들고 후후 불어가며 차를 마시는 노인들. 아침 댓바람부터공원으로 밀려 나온 저 노인들의 마음은 정말 표정처럼 평온할까? 이런 질문을 던진다는 건 내가 이미 노인들은 불행하다고 단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초록색 나뭇잎보다 가을바람에 바닥을 뒹구는 낙엽을 더 아름답다고 느끼면서도, 인간의 노년만은 불쾌하고 추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음악이 들려온다. 경쾌한 음악을 틀어놓고 칼춤이나 부채춤을 추는 노인들, 남녀가 짝을 이뤄 사교춤을 추는 노인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의 춤사위를 넋 놓고 바라보다 한갓진 곳에 나란히 앉아 있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발견했다. 보행기에 앉은 두 노인은 나직한 목소리로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세상을 등진 채 덩그마니 떠 있는 두 개의 달이 애틋해 따스한 봄바람이 분다.
요즘 나는 말랑말랑한 사랑 이야기가 나오면 채널을 돌리거나 책장을 덮곤 했다. 아무런 기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사랑 이야기를 읽고 또 겪었기 때문일까. 빤한 결말을 너무 쉽게 짐작했다. 아직 움직일 수 없을 만큼 근력과 체력이 다 하지도 않았으면서, 마음이 먼저 폭삭 늙어버린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신은 나이와 함께 망각을 선물해 주는지 모른다. 이미 알아버린 사랑 이야기의 패턴 같은 건 잊으라고. 마치 생전 처음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이라고는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 다시 설레라고.
알록달록하고 폭신한 솜사탕 같은사랑 대신 볼품은 좀 없어도 탱글탱글 잘 익은 알밤처럼 단단한 것들을 주워 모은다. 혹여나 코 고는 소리에 잠 못 들까 내가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 잠자리에 들어오는 남편이 내는 사각사각 소리, 잠든 내 이마에 살짝 갖다 댄 그 입술의 온기 같은 것. 늦은 오후 따뜻한 차 한 잔에 어울리는 티푸드는 화려한 케이크만이 아니다. 약과나 고구마도 달콤하고 든든하다. 사랑이 끝난 게 아니었다. 모양과 빛깔이 좀 달라졌을 뿐.
“언제까지 이 빌어먹을 왕복 여행을 계속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플로렌티노 아리사에게는 53년 7개월 11일의 낮과 밤 동안 준비해 온 대답이 있었다. 그는 말했다.
“우리 목숨이 다할 때까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콜레라 시대의 사랑> 중)
윤소희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