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거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박차순 할머니가 18일 오전 7시 33분 후베이(湖北)성 샤오간(孝感)시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95세. 박 할머니는 재작년부터 척추협착증·결장염·뇌경색을 앓다가 최근 증세가 악화돼 운명했다.
지난 19일 오전부터 자택에 마련한 빈소에서 조문객을 받았다. 20일 오전 발인 후 화장장으로 치렀으며 유골 안치는 유족의 뜻에 따라 이뤄질 것으로 전해졌다. 우한총영사관에서는 영사를 파견해 장례를 지원 중이다.
1923년 전북에서 태어난 박 할머니는 1942년께 중국 내 일본군 점령지역에 끌려가 해방 전까지 난징(南京)·한커우(汉口)·우창(武昌) 등지의 일본군위안소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다.
박 할머니는 생전에 정확한 고향의 주소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누차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여러 차례의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조선에 가고 싶소”라고 읊조렸고 “죽으면 유골을 강물에 뿌려달라”고 말했다. 그 강물을 타고 고향에 가겠다는 뜻이었다.
이렇듯 간절히 고향 땅을 밟기를 소원했던 박 할머니는 왜 끝내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중국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을까?
2015년 호북일보(湖北日报)는 박 할머니의 어린 시절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마오인메이(毛银梅, 박차순 할머니의 중국 이름)의 집은 가난했다.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 간 후 소식이 끊겼고, 어머니는 여동생을 데리고 어딘가로 가버렸다. 그녀는 친척집에서 사랑 받지 못하고 자랐다. 열아홉이 되던 해 이런 생활이 싫어 무작정 조선땅 북쪽으로 가 주점에서 일을 했지만 돈은 벌지 못했다.”
그 후로는 한국에도 잘 알려진 대로 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말에 속아 중국 위안소로 끌려오게 됐다. 해방 후 일본군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위안소에서 탈출했지만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한 것이 부끄러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중국에서 양녀를 키우며 생활한 박 할머니는 차츰 세월의 흐름에 우리말도 어린 날의 기억도 잊어갔다. 그럼에도 아리랑 노래가사와 ‘아버지’, ‘어머니’만큼은 또렷이 발음했다.
이후로는 한국국적 회복이 이뤄지지 않아 한국에 갈 수 없었다. 지난해 현지 한국인들의 후원으로 한국행을 준비했지만 건강이 갑자기 악화돼 취소하기도 했다. 박 할머니는 2015년부터 척추협착증, 결장염, 뇌경색 등에 시달렸다.
한편, 한국 정부는 2015년 12월 28일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일본 정부와 협상, 타결했다. 일본 정부는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죄와 반성을 표한다고 밝히며 ‘위안부 문제의 불가역적 해결’을 전제조건으로 10억 엔의 보상금을 거출했다. 한국 정부는 이를 수용하고 ‘주한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문제가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하겠다’고 합의했다.
최근 일본 아베 총리가 부산의 일본 총영사관 앞 소녀상 설치를 두고 “10억 엔을 받았으니 한일합의를 이행하라”고 말하면서 한국에서는 “잘못된 한일협정을 파기하고 10억엔을 돌려주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또 경기도의회가 독도에 소녀상을 설치하겠다고 밝히면서 일본 외무상이 “독도는 일본 영토”라고 망언을 하면서 양국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고 있다.
현재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9명 중 생존자는 39명으로 줄었다. 재작년 12월 28일 한일 정부의 위안부 합의 이후 별세한 피해자는 박 할머니가 여덟 번째다.
김혜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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